심용섭 목사(엘파소 연합감리교회)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순결한 것과,  칭찬할 만한 것을, 골똘히 생각하십시오.(빌4: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모습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개혁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정작 개혁 앞에서는 회피하고 개혁의 대상을 다른 사람에게로만 돌리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바르게 이 세상을 인도해야 한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의 신앙이 건강하고 바르게 가르쳐지고 배워져야 합니다. 그 교회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따라서 개혁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개혁은 사실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따라 순종하여 날마다 새 피조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면 그것이 곧 건강하고 바른 교회이며 살아있는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이 되는 것은 본질입니다. 본질이 본질로 되면 됩니다. 모두 제 자리를 찾아가면 됩니다. 아닌 것은 벗어버리고 참인 것을 입으면 됩니다. 구원은 회복입니다.

 

 

저는 7주간의 부활절을 지내며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기다리면서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이 글은 우리의 아픔이고 부끄러움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를 거울처럼 돌아볼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해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목마른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좀더 잘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어두운 그림자도 우리의 소중한 보물도 같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을 새롭게 익혀야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005년 6월

엘파소 연합감리교회에서 



 

 

    (1) 선한 것이 악한 것에 밀리고 있습니까?

 

16세기 영국의 재정가 토마스 그레샴(Thomas Gresham)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나쁜 돈이 좋은 돈을 몰아낸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 이 것은 경제적 법칙을 말합니다. 이를 그레샴의 법칙이라고 부릅니다. 가치를 달리하는 두 가지 종류의 화폐가 동시에 같은 액면가치를 지니고 유통될 경우, 악화가 오히려 양화를 국외 또는 유통 밖으로 쫓아낸다는 경제적 현상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말로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 구조에서 나쁜 정치가 좋은 정치를 몰아내는 현상, 사회적으로 나쁜 문화가 좋은 문화를 밀어내는 현상, 개인적으로는 좋은 습관보다는 나쁜 습관이 생활을 지배하는 현상, 신앙적으로는 죄악이 선한 진리를 밀어내는 현상, 교회에서도 선한 양이 나쁜 늑대와 이리에게 밀려나는 현상, 이런 현상을 보면서 나쁜 것이 오히려 선한 것을 이긴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계신 거야?" 하고 자조 섞인 탄식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 때 착하게 살면 손해보고 악하게 살아야 잘 사는 거야."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믿고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진리를 듣고 배울 때 아멘 하고 동의 하지만 세상에 나가 살 때에는 세상의 수단과 방법으로, 마치 비 신앙인처럼 살아가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정당화 합니다. 이 것은 사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이론을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한 것이 선한 것을 이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선한 것이 악한 것에 밀려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믿고 행동하십니까?

 

 

    (2) 악한 것이 이긴다는 믿음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하는 통속적 격언처럼 오랜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방법이야 어떠하든,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기기만 하면 정당한 것이 되고, 수와 세가 많이 불어나 몸집이 커져 힘이 세어지면 아무리 옳지 못한 일이라도 도리어 정당하며 진리인양 행세하는 현상들이 지배했습니다. 광주에서 수 천 명에게 총질을 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를 두고 한국 사법부와 국회는 "성공한 쿠데타는 심판하지 않는다."라며 신기한(?) 논리로 두둔했던 적이 있는 것을 보면(지금은 정죄 되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은 한국에서 선명하게 증명 된(?) 진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부터 2004년 초까지 한국에서 살아온 저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현상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오랜 동안 부정적이고 어두운 현상에 노출된 결과였습니다. 조선 500년은 일방적으로 한 군주에 의하여 모든 백성이 지배를 받는 노예와 같은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끝내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 압제 아래서 폭압의 36 년간을 보냈습니다. 일방적으로 일본의 총칼 아래 짓밟히고 살았습니다. 항일을 하면 죽고 친일을 하면 살 수 있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험에 익숙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하고도 친일청산은 안되고 도리어 악화가 더 기승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조 섞인 말, 친일파는 떵떵거리고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은 도리어 가난과 궁핍함에 기를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숙명처럼 수용해야 했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는 살아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존재의 불안은 마치 민족성처럼 되었고 사람다움보다는 짐승 같더라도 일단 살고, 이기고 보자는 원시적 본능에 의존된 사회현상이 일반화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옳고 틀린 것을 분별하는 것은 사치처럼 인식 되었고, 불의한 과정을 통해 얻은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떵떵거릴지언정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는 현상이 한국사회의 자화상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옳은 길을 걷으며 바르게 살면, 큰 고통과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는 피해의식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3) 교회도 세상의 풍조를 닮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독립운동의 대표적 상징이었던 김구(金九)는(그는 감리교회 신자였습니다) 암살을 당해 한국 땅에서 내몰렸고 결과는 6.25라는 한국전쟁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전쟁을 통해서 우리 조국 한국은 지금까지 동족을 서로 원수로 여기면서 모든 악한 씨앗의 모판이 되었습니다. 원수 맺고 사는 일이란 본디 악의 극단으로 치달아 가게 됩니다. 그 결과로 남북으로 갈라진 정치적 분단보다 더 지독하고 심각한 마음의 분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분단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편과 저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현상은 한국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고 이민 사회에서도, 그리고 한국 교회와 이민 한인 교회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우리들의 자화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살펴보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내 몬다는 현상이 우리 한국인의 의식 속에 패배주의적 신념처럼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며 세상 속에 진리를 이루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라는 신념처럼 아무렇게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신앙을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많아지고 수가 많아져 몸집이 커지면 그것이 곧 좋은 교회라고 믿는 세속적 가치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성서적 진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생명적 가치보다는 세속적 계산에 따른 성공이 정당하고 좋은 교회의 척도가 되는,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교회의 두드러진 현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삶을 통하여 진리를 실천하기보다는 인간의 물질적, 심리적, 그리고 감정적 필요와 욕망만을 채워가는 세속주의화 된 기독교는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의 "종교는 인간 욕망의 투사."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죄악의 본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으로 감추거나 거룩하게 보이도록 위장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런 행위는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가 되는 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회개와 자기부정을 통해 자신의 부끄러운 죄를 드러내고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며, 새 피조물이 되어 다시 사는 것입니다(고후 5:17).

 

 

    (4) 한국인 교회의 한계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을 살피면 우리 민족이 겪어왔던 역사 속의 아픈 상처가 치료되지 못한 채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나타나는 많은 문제들은 이 역사적 상처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제가 1990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첫 목회지로 나갔을 때, 교회 안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여 교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신학교 입학하기 이전부터 하였기에 저로서는 충격적 경험이었습니다. 오늘의 교회 문제는 오늘의 사람에게 있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유전처럼 되물림 된 아픈 상처들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형성된 인격적이고 문화적인 통념에 바탕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원리에 따라 형성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것이 좋은 것을 밀어내고 차지하는 현상은 사람들의 감정을 업고 교회 안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속적 가치판단을 앞세우며 득세하는 교회 질서를 만들어왔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의 밭에서 자라났습니다. 한국인 역시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한국의 역사적 아픈 상처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겪거나 전달받아 왔으며 우리의 인격은 그 문화적 역사적 흔적들이 아로새겨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다만 알아차리고 문제를 극복한다면 전화위복 轉禍爲福 이라는 말처럼 더욱 건강하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는 한국의 아픈 역사 속에 아픈 상처를 안고 자란 한계도 지니고 있지만 그 아픈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과제도 주어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역사 속에서 처참하게 상처 입은 민족을 치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 계획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그들을 치유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책무가 분명해집니다. 우리 민족의 내면의 삶 속에 마치 민족성처럼 자리 잡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첫 단계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나쁜 것이 좋은 것을 몰아낸다는 보이지 않는 패배주의적 신념을 씻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5) 교회가 달라져야 합니까?

 

흔히 사람들은 교회의 개혁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개혁이란 "달리는 자동차 바퀴를 갈아 끼우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을 열면 한결같이 교회가 달라져야 한다며 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개혁하자 할 때 뒷걸음 질 한다고 말합니다. 저의 경험으로 보아도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 자신과 상관이 없는 교회 개혁은 지지하고 동의하지만 나와 상관이 있는 개혁은 반대한다는 입장에 굳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자신만 제외하고 다른 대상만 개혁해야 한다는 매우 이기적인 믿음의 결과입니다. 이 것도 역시 한국 사회의 일반적 문화가 아닙니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한다는 것을 교리적으로만 믿을 뿐(이런 믿음은 자신의 양심과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간단하고 명쾌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세속적 기득권을 포기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목사는 오직 성서 안에 나타나 있는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고 그 권위를 지키면서 세속적 권위를 내려놓으면 됩니다. 교인들 역시 성서적 말씀의 진리 앞에 복종하고 세속적 욕망과 감정 그리고 기득권을 교회 안에서 내려놓으면 됩니다. 오직 성경 안에 나타나 있는 진리를 따라 가면 됩니다.

 

    또 한 가지는 분별력입니다. 교육의 참 목적은 분별력에 있습니다. 철학적 사고능력은 논리적 분별 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바른 신앙은 영적 분별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사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학교가 교육을 통하여 분별 있는 인간을 길러내듯이 교회는 교육을 통하여 영적 사고 능력, 영적 분별이 있는 신앙인을 길러내야 합니다. 감리교회는 전통적으로 신앙의 4가지 요소의 조화를 중요시 했습니다. 그것은 성경, 경험, 전통, 그리고 이성입니다. 신앙의 신비성을 강조하여 영적인 세계가 마치 무대뽀 감정이나 비이성적 흥분인 것처럼 잘못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라고 증거한 사실은(1:14)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가 가장 구체적이며 이성적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에는 영적이면서도 이성적인 균형이 필연적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균형성에 관심해야 합니다.

 

 

    (6) 교회가 달라질 수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십자가를 피하여야 한다는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의 그 같은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가장 아끼는 제자에게 "너는 사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도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 안락함과 편리함, 그리고 그릇되고 잘못된 습관들이 십자가의 고통을 어리석은 것으로, 진리를 바보같은 말장난으로 내몰 수 있는 위험한 악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믿음은 사실 사탄과 같습니다. “나쁜 것도 익숙해지면 좋은 것이 되니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이나, “좋은 것이 좋다.”는 말이 진리처럼 들리고 진리처럼 행세한다면 그리고 그 말을 따르는 것은 사실상 진리를 폐기하는 행위입니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의 현실이긴 하지만 인간의 죄성을 드러내 주는 것이지 복종할 진리는 결코 아닙니다.

 

    나는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니 어떻게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 수 있겠소?"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오, 적당히 흐려야 사람들이 몰리지..."라는 말도 듣습니다. "좀 적당하게 덮고 넘어가야 편하지 진리를 말하면 피곤해집니다." "하나님이 다 용서하라 하셨으니 어쩌겠소, 그냥 넘어갑시다."라고도 합니다. 다들 일리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나에게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말처럼 들립니다. 사탄의 유혹 같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죄성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구별할 줄 아는 분별력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와 용서도 가능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에게 선명하게 이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당신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시고(행5:30)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엡1:22)." "회개하라"(행2:38)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세상에 빛이 왔으니 더 이상 어둠이 이기지 못했다. 고 증언합니다(1:5). 이제는 어둠의 세상이 아니라 빛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면 그것은 분명 어둠의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빛의 세상을 삽니다. 악화가 양화가 된다는 것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며(고후5:17), 우리 모두는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마5:14).


    (7) 당신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우리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법칙을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악화가 양화가 되는 일을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오심을 증언하면서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1:5)라고 증언합니다. 이 문장은 현재완료형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but the darkness has not understood it."(NIV)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빛은 어둠을 이기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요한복음의 증언을 믿습니다. 빛이 승리하는 것이지 악이 승리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최후 승리는 선한 것이 차지합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를 믿습니다. 이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3-14).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제자 된 우리는 지금 모두 빛입니다. 어둠이 이긴다는, 악이 이기고 선이 패한다는, 그리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세속적 진리(?)는 이제 폐기해야만 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힘 센 아이를 따라갑니다. 아이들에게는 진리적 가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힘이 센 아이가 짱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합니다. 악한 것이 힘이 더 있는 것처럼 보이고 힘 있는 쪽에 붙어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은 유아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진리가 승리한다는 확신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승리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 합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 환하게 밝히는 교회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은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나는 이 글을 부활절 여섯 번 째 주일 오순절, 성령강림절 한 주 전에 시작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저에게 신앙쇄신운동과 교회 쇄신운동을 촉구하십니다. "건강하고 바른 교회"운동을 엘파소 교회와 엘파소 한인 사회에 시작하도록 이끄십니다. 저는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이 글은 교회 창립기념주일 성만찬 예배를 드린 후 마칩니다. 이제 교회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성령이여 어서 오십시오.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영적 순결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의 진리를 따라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빛이 세상에 왔으니 어둠이 이기지 못했다는 증인이 되게 하소서. 어둠이 더 이상 빛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건강을 회복하여 하늘 진리로 세상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교회가 진정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영광이 드러나게 하옵소서. 아멘

 

아래의 말씀을 묵상해봅시다.

 

 

    연합하는 교회 (엡 4:1-6)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러 주셨으니, 그 불러 주신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언제나 겸손함과 온유함을 지니십시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오래 참으십시오.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건강하고 바른 교회 (엡 4:11-16)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회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 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 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거나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 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합니다.

 

 

   새로운 존재 (엡 4:17-24)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면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스스로를 방탕에 내맡겨서 탐욕을 부리면서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게서 듣고, 또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새로운 생활의 규범 (엡 4:25-29)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말고 수고를 하여 제 손으로 떳떳하게 벌이를 하십시오. 그리하여 오히려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하십시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을 대비해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새로운 존재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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